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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카바의 짧은 생각

우리는 조국과 해병대가 부를 때 한 깃발 아래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한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군대를 가는 것은 숙명이었다
1999년 내가 입대 했을때 제 1차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훈련소에 있던 시절이다. 
동기는 어디서 정보를 입수 했는지 교관에게 물었다. 
"소대장님 전쟁이 납니까?" 라고 묻자 교관은 아주 어둡고 심각한 얼굴로 
"니들은 다음주에 제주도로 간다. 거기서 대기하다가 배를 타고 북진한다"
라고 심각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 말을 믿었다. 동기는 날라다니는 신문 쪼가리를 보고 그 정보를 입수했다고 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를 가졌다. '아! 전쟁이 났구나' 라는 말을 곱씹었다. 
이제 갓 훈련소에 입소한지 3주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리에게는 어떤 판단도 주저함도 있을 수 없었다. 비록 3주전에는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한 곳에서 군대 잘 다녀오라는 환영 인사를 받으며 2년 2개월 금방 시간이 간다고 믿었던 애송이였다. 

찢어진 CS복을 입고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부르며 연병장을 굴렀다. 밥은 모래알 같았지만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입소할때 보았던 동기들의 허여멀겋던 피부는 진한 구리빛으로 변해 있었다. 
궁시렁 대는 놈들은 없었다. 이빨을 보이는 놈들도 없었다. 눈빛에는 악기가 가득했다
'하면 된다'라는 구호는 고 3 수험생들이 수능시험 보기 전에나 쓰는 문구였다. 우리의 머리에는 '안되면 될때까지' 라는 새로운 구호가 새겨졌다. 3주란 시간은 짧지만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그곳은 '인간 개조의 용광로' 였다.

6주의 훈련을 받고서 우리는 뿔뿔히 흩어졌다. 난 1980년생이 아니라 854기로 다시 태어났다. 
포항 훈련소 연병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팔각모 사나이' 를 목청이 터져라 불렀다. 우리는 GMC 육공트럭에 오와 열을 맞춰 올라타서 동기의 얼굴을 보며 '천당에서 지옥' 까지 박수를 쳤다. 짧은 6주 동안 함께 구르고 악다구니를 쓰며 함께 군인이 되어갔다. 
우리는 다시 보기 힘들 얼굴이었다. 누구는 포항 1사단 황룡부대로 누구는 김포 2사단 청룡부대로 누구는 백령도 흑룡부대로 누구는 연평도 6 여단으로 ...

김포로 배치를 받아 열차를 타고 서울역을 향했다. 6주만에 보는 민간인 들은 여전히 활기차고 바쁜 걸음으로 지나치고 있었다. 우리는 꽃봉을 메고 열을 맞춰 열차에 올라타 지나치는 풍경을 곁눈질로 흘겨 보았다. 호랑이 같았던 교관들도 그날 만큼은 우리들의 곁눈질을 눈감아 주었다. 
서울역에 몇백명의 짝대기 하나짜리 군인들이 꽃봉을 맨채 오와열에 맞춰 버스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한 우리를 지켜보고 호기심 어린듯이 지나쳤다.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동기들의 엄마와 누나가 자꾸 이름을 불렀다. 동기는 눈동자도 움직일 수 없었다.두 주먹 불끈 쥐고 차렷자세로 앞에 서있는 동기의 뒤통수만 노려 보았다. 
동기의 엄마와 누나는 이름을 자꾸  불렀다. 동기는 대답을 할수 없었다. 옆에 있는 내가 대답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군인이 되었다. 엄마와 누나는 자꾸 눈물을 흘렸다. 그을린 동기의 모습에 조금 수척해진 모습에 안타깝기도 했지만 아마 늠름한 아들과 동생을 보고 눈물을 터트렸을 것이다. 끝내 우리는 대답도 못한채 버스에 올라탔다. 

동화교육대에 입소를 했다. 
이제 실무로 가는 것이다. 와중에 백령도와 연평도로 발령을 받은 친구들은 곧장 위로휴가를 나갔다. 그들은 우리보다 꿀맛을 일찍 보는 셈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섬 생활은 훨씬 고될것이라는 것을....포항에서 반으로 쪼개졌던 동기들은 다시 줄어들었다. 

2박3일의 동화교육대가 끝이나고 실무에 배치를 받았다. 
동기들과의 군생활은 그렇게 끝이났다. 위로 선배들이 까마득했다. 
훈련을 나가 선배들과 진흙탕에서 구르고 뻘밭에서 보트를 머리에 이고 목이 터져라 '빠따가'를 불렀다.몇 백번 몇 천번 빠따가와 청룡은 간다 를 부르니 짝대기 하나가 더 생겼다. 후배가 생겼다. 함께 산속을 헤매고 동계훈련을 하면서 진지에서 밤을 새웠다. 쫄병시절 함께 추라이 작업을 나가서 얻어온 초코파이를 화장실에서 함께 까먹었다. 

후배도 나도 짝대기를 하나 더 얹었다. 모자가 무거워서 제대로 쓸수도 없었다. 
위보다 아래가 더 많아졌다. 후배들이 부르는 빠따가에 후렴구를 붙일수 있는 짬밥이 되었다. 
여전히 후배들과 산속을 헤매이고 뻘밭을 구르고 근무지에서 '주란꽃' 을 나지막히 부르며 밤을 새우며 경계 근무를 섰다. 
전역하던날 후배들이 막사앞에서 '천당에서 지옥까지' 박수를 치며 곤조가를 불러 주었다. 
눈물이 났다. 꾹 참았다.'니들에게도 이런날 온다' 라며 한명 한명과 악수를 나눴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는 구호를 하는 후배의 든든한 어깨에 조국을 맡기고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난 꿈에도 그리던 민간인이 되었다. 
10년이 지난 오늘 그 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끓어오른다. 
후배가 전사했다는 뉴스를 불가리아에서 읽었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 동안 인터넷에 속보로 올라오는 뉴스를 읽었다. 
서정우 해병은 제대가 며칠 남지 않고 병장 휴가를 나가던 길이었다는 기사를 읽고 눈물이 고였다. 문광욱 해병은 입대 3개월밖에 안된 후배라는데 위로휴가는 다녀 왔는지... 목이 메였다.
옆에 앉은 호주 친구가 내 얼굴을 보고 무슨일이냐고 묻는다. 
잠시 얼굴을 두손으로 감쌌다. 

팔각모에 책 받침 넣어 구겨지지 않게 각을 세우고, 세무워카 털 뽑아 짜세나게, 빨간명찰 자랑스레 드리우던 젊디 젊은 후배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안되면 될 때까지라는 구호를 외치며, 악다구니 쓰며 진흙탕에서 구르며, 조국을 위해 젊음을 불태운 그들에게 도데체 무슨일이 일어난 것인가!

푸른 물결 출렁이는 곳 갈매기떼 넘나드는 곳 서부전선 연평도에도 황혼빛에 물들어 간다. 어머님은 정화수 떠다 칠성단에 올려놓으시고 해병대 간 불효 자식 위해 밤 새워 기도 드린다. 갈매기야 날아서 부모님께 내 소식 좀 전해다오. 해병대간 불효자식 몸성히 잘 있다고

우리는 조국과 해병대가 부를 때 한 깃발 아래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한다.
  두 해병 후임님들의 명복과 희생되신 민간인 분들의 명복을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