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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카바의 짧은 생각

꽉 막힌 세상

호오 대단하다. 내가 스무 살 무렵 난 뭐가 그렇게 자유로웠을까? 돌아보니 할 것도 많았고 해야 할 것도 많았는데 왜 그렇게 자유로웠을까?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일은 딱히 없어서 그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다닌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지금보다 달고 다니는 비계양도 적고 날렵한 턱선에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해서였을까? 지금이라고 자유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느끼고 있다. 우선 부양할 가족이 있고 해야 할 일은 딱히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은 많다. 게다가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 아니던가?

이 세상이 아직 역병에 갇히기전 그러니까. 2020년 새해쯤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그때도 사실 이 역병은 중국에서 창궐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 어디쯤에서 시작해서 그렇게 그럭저럭 2000년대 초반의 사스처럼 끝날 줄 알았더랬다. 그래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고 아니 여행을 시작했다고 하면 말이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미 2019년 9월부터 아이들 학교를 잠시 접어두고 아이넷과 함께 캠핑카로 호주 전역을 여행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2020년 2월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도착해 보니 2월 중순이다. 그리고 한국에 종교 발 확진자가 1000명씩 나오고 한국이 졸지에 이탈리아 스페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확진 국이 되어있었다. 그달 말에 우리 큰누나는 스페인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취소를 하게 되었다. 세계는 그야말로 이상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때쯤 안갯속을 걷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짙고 오래갈 안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 팔순쯤을 기해서 인사 온 정도 아니 조금 여유 있게 한국 방문 정도로 생각했었고 한국을 거쳐 러시아로 그리고 유럽으로 자동차 여행까지 계획을 했었으니까. 그 계획들이라는 것들이 어떤 틀에 들어 있던게 아니어서 당장 실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한국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난 알게 되었다. 이 안개는 옅어지기는 커녕 점점 더 짙어지고 2020년 3월쯤에는 짙은 안갯속에서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호주 정부가 자국민들 해외여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일단 호주에 돌아가면 당분간 다시 한국으로 아니 호주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호주가 중국인을 받지 않았을때는 그러려니 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그냥 방역을 조금 세게 하는 거라고 그런데 외국인 관광을 중단하더니 자국민 해외여행을 금지한다고 게다가 기약도 없이? 황당하기도 하고 시국이 이해되기도 하고 어쨌든 우리 가족은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넷의 한국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뭐 한국에서의 생활은 길기도 하고 또 단순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음에 이야기를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다.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처럼 팔순의 아버지가 전쟁통에 거적때기를 세워서 다닌 학교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 6남매가 다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4학년 3학년 1학년 그리고 병설 유치원 전교생의 10프로에 육박하는 4 자매는 그렇게 한국에서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말을 할줄 모르는 아이들이었고 한국 선생님들은 조금 당황해 보였지만 아이들의 적응력은 뛰어났다. 호주인 아내는 불편한 시골생활에도 별로 불편한 기색 없이 불편함을 견뎌 주었다. 시골 생활도 그리고 전혀 다른 환경의 이국생활 그리고 이상한 국제정세?와이프는 그해 8월에 호주에 돌아갔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이 있었고 호주에서 마지막으로 호텔 격리에 비용을 부과하지 않은 마지막 달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일이 없으면 못 사는 아내는 곰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4 자식을 뒤로하고 6개월 만에 혼자 귀국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시골 깡촌으로 돌아가 난 바다에서 낙지를 잡고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나온 소학교 아빠가 나온 국민학교 본인들의 초등학교로 돌아갔다.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인데 아내가 혼자 귀국을 한 것은 아이들의 한국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의 한국어는 일취월장했다. 더 이상 시골집에서 영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난 자주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그래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벌어야지!" 여전히 우리 집 바깥양반은 아내이고 난 안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해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2월에 호주에 돌아왔다. 원래 살던곳 서호주 퍼스가 아닌 3000킬로 떨어진 남호주 에들레이드에서 호텔 격리를 했다. 2주 동안 아이넷과 함께 지지고 볶고 그리고 다시 3000킬로쯤 되는 시드니에 도착했다. 왠 시드니? 그렇다 우리는 퍼스에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도시인 시드니에 정착을 했다. 그 이유는 와이프 일이 시드니에 있었고 아이들에게 시드니에서 살아보는 기회를 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에게 호주는 섬나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대륙인이다. 대륙인이란 자고로 태어나서 자란 곳에서 죽는 사람들이다. 커다란 땅덩이 사람들이다. 중국인들의 90프로는 바다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고 미국인들의 70프로는 여권이 없다고 한다. 호주인들은 그와는 좀 다르다. 99프로의 사람들은 바닷가 근처에 산다. 그리고 꽤 많은 호주인들은 해외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대륙인이라는 건 바로 자신들이 태어난 주에서 자라고 결혼하고 그곳에서 평생을 살기 때문이다. 아내의 직업 특성 그리고 가족력때문에 혹은 덕분에 아이들은 다양한 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기회일 수도 있고 쓸데없는 뭔 가일 수도 있다. 5학년인 큰아들의 경우는 벌써 5번째 학교니까 말이다. 도대체 친구 사귈 기회가 없기도 하겠고 아이들은 그렇게 시드니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난 다시 5학년 4학년 2학년 1학년의 학부형이 되었다. 이 말인즉슨 아침마다 4개의 도시락과 간식거리를 챙겨야 한다는 소리다. 여전히 난 안사람이었다. 그즈음 호주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다. 난 집장사를 하는 사람이고 이건 기회일 수도 있었고 또 다른 위험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여행을 시작한 처음 시점 그러니까 2019년 9월 즈음 난 모든 자산을 처분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내가 바깥주인이 되어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퍼스에 돌아갔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 그리고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오른 집값에 부동산 업자들의 코는 하늘을 향해 있었고 부르는게 값이고 널린 게 매수자였다. 그렇게 다시 바깥양반이 되어 퍼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때 와이프는 진짜 전쟁을 시드니에서 치르고 있었다 일하랴 아이넷 학교에 보내랴. 한국에서 내가 했던 것과는 또 다른 압박이다. 한국학교는 스쿨버스가 있었고 무료 급식이 있었다. 부모가 할 일은 그저 학교 잘 다녀왔냐고 묻고 저녁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호주 사정은 다르다. 게다가 한 명이라고 아프기라도 하면 일도 안되고 아이들 케어도 기하급수적으로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쯤엔 호주에 확진자가 한명도 없었다. 호주 전역에 하긴 입국자도 호텔 격리에 자국민들 해외여행도 불가능하니 그럴 만도 했다. 대륙이지만 섬이기에 하늘길만 막으면 거의 완벽한 봉쇄가 가능하니 말이다. 그런데 델타 바이러스가 퍼진것이다. 공항에서 호텔로 해외 입국자들을 실어 나르는 버스기사가 감염이 되어서 지역사회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때쯤 난 퍼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시드니는 봉쇄가 되었다. 2021년 8월쯤이다. 어느정도 일을 마치고 시드니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미 봉쇄 중이었기 때문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은지 한달이 넘었고 아내는 자택 근무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거의 두 달 만에 본 아이들은 훌쩍 커있었다. 마냥 반갑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랬다. 홈스쿨링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시드니에 들어올 때는 하루 확진자가 100명 안팎이었는데 금세 600명이 되더니 1000명이 되고 1600명이 되어버렸다. 이번 델타 바이러스는 쉽게 넘어갈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서호주에서는 시드니에 사는 서호주 사람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빨리 돌아오라고  그리고 주 경계를 막아버렸다. 한국 같은 중앙정부 시스템에서는 황당한 이야기 일수 있겠으나 연방정부 시스템인 호주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주 경계를 막다니..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한동안 퍼스에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호주는 열심히 백신을 맞았다. 뉴사우스웨일스는 장장 104일간 도시 봉쇄가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는 90프로가 넘는 백신 접종률의 기염을 토해냈다. 적당히 당근과 채찍으로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온것이다. 백신이 남아돈다는 미국은 겨우 70프로 언저리다. 비슷환 혈통의 앵글로 섹슨족이 주류인 호주가 이렇게 치고 나갈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다. 그리고 봉쇄는 완화되었다. 오늘 글을 쓰는 지금 막내인 1학년은 학교에 가고 있다. 나머지 2학년 4학년 5학년은 다음 주부터 등교를 하게 된다. 난 다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 기분에 취해서 이렇게 자유에 대한 글을 열심히 적고 있는 것이고 아직 호주 밖으로 여행을 하는 것은 금지가 되어있고 서호주 경계를 넘어가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주 월요일이면 난 자유로운 몸이 될 것이다라고 확신을 하고 있다. 이제 안개가 조금 걷히는 느낌이다. 시드니도 호주도 위드코로나로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 아내와 나는 다음 달 그러니까 2021년 11월이나 12월쯤에 서호주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잘 안될지도 모른다. 서호주에서 오지 말라고 한다. 거주 이동의 자유가 없는 호주다. 어떤 신문 기고에는 북한과 비교한 기사가 나올 정도다. 어이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꽉막힌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조금만 힘을 내면 된다.  다들 와자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