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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아빠의 청춘!


"산모한테  미역만한거 없다. " 엄니한테 이런 말씀을 듣고서 ...
시내에 나가 한국 식품점에서 미역국을 사왔다.
도대체 '산후조리'  혹은 '산후풍' 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봤지만 아내는 여전히 의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마치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미신'을 대하는 태도처럼 말이다.
아이 목욕을 시켰다. 아이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목욕이었고 나에게는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시켜보는 목욕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미역국을 끓여 밥을 말아 주니 고맙다며 입을 삐죽 내밀어 뽀뽀하는 척을 한다.
"별로 안 좋아 하잖아!"전에 한번 숟가락 한번 넣어보고는 내려놓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아내는 궁물에다 밥을 말아먹고 미역 건더기는 내 그릇으로 옮겨 놓았다.
"서방님 우유에다 밥 말아아 먹으면 몸에 좋다거나 뭐 그런건 없어?"
참 다르다. 이건 아이 낳고 아빠가 된 내가 미역국을 먹은셈이다.

내가 워낙 집도 절도 없이 호주에 와서 처갓집은 아내에게 참으로 든든한 존재다.
물론 내게도 든든한 존재이기도 하다.
병원에 있을때 하루가 멀다하고 들러서 아기를 구경하고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
심지어 처형은 급하게 오느라 짐도 제대로 못싼 내 속옷까지 챙겨왔다.
아이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면서도 ...조카들과 함께 어린이샷을 하면서도 난 활짝 웃었다.
마누라가 이쁘면 처가 말뚝에다가도 절을 한다고 하던가!
그 절을 하다가도 문득 시골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나는 한국 나이 32이 되고서야 아버지가 되었다.
유부남이 되었을때와 아버지가 되었을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어쨌든 고등학교때부터
"저 아저씨는 왜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나?" 라는 생각이 드는 인상을 갖고 있던 내게 '아저씨' 오히려 친숙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고등학교 졸업 예정증명서로 입대를 했으니 20이 되자마자 바로 '군인 아저씨' 가 되었던 셈이다.
우리 아부지는 40이 되어서 막내인 나를 낳으셨는데 어떤 기분이 드셨을까?
나처럼 아들이 귀여워 무릎에 올려놓고 볼따구를 찔러보며 웃고 있었을까? 기저귀를 갈아 채우면서 똥을 쏴대도 마냥 귀엽다며 배꼽을 잡았을까? 6번째 였으니 그 정도는 아니었을까?
젊은 아버지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바닷일과 농사일에 항상 지쳐 있었던 아버지의 깊은 이마 주름만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인자 참말로 어른인께 성실허게 살아야써!"
내가 결혼을 했을때 아이를 낳았다고 전화를 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아버지에게 이름을 부탁드렸다.
"긍께 종자 돌림이여....그러고 알고 있어"  라고 하시더니 전화를 끊으셨다.
아이가 예정보다 빨리 나와서 조금 서둘러 달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정말 서둘러서 이름을 '뚝딱' 하고 지어주셨다. 누나들도 형들도 촌스럽다고 만류 했지만 난 그 이름이 좋았다.
사실은 중간 이름이다. 앞 이름은 아내인 트래시가 영어로 지었고 중간 이름은 아버지가 주신 돌림자를 쓴 이름으로 지었다.아버지에게 이름을 받은 이유는 별 다른게 없다.
아이가 커서 혹시라도 물어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다.
그럼 난 목을 큼큼 거리며 가다듬고 눈을 지그시 뜬채로 동북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니까...니 이름은 말이다. 1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단다. 백씨의 시조가 ...."
뿌리를 잊어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우는 모습 웃는 모습 찡그린 모습 젖을 먹는 모습 .....
아부지와 엄니에게 보내주려고.
얼마나 궁금하실까.....설마 ..9번째 손주라고 궁금 안하거나 그러시진 않겠지?
아내 트래시가 아이를 낳았을때 엄니에게 전화를 하니 ...
"긍께 ....트래시 헌티 ...수고혔다고 꼭 전해 주그라....수고 했다고 ..글고 ..미안해서 ..워쩐다냐..멀어서 가도 못허고..."
엄니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 한켠이 참 짠해졌다.
멀리 있는 나는 미안하지도 않고 짠하지도 않았는데 ..엄니는 멀리 사는 아들이 참 짠했던 모양이다. 덩달아 나도 짠해졌다. 우리 엄니는 나 낳고 시어머니한테 수고했다는 말을 들었을까?
딸만 많이 낳았다고 눈치를 받지는 않았을까? 알길이 없다.

난 여행을 다니면서도 앨범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 앨범엔 엄니와 아부지의 사진이 한장 들어있다.
69년도에 찍은 사진이다. 엄니가 막 시집을 와서 큰딸을 낳고 아부지는 막 정치계(?)에 발을 디디신 마을 이장 기념 사진!
이 사진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내가 보지 못한 엄니와 아부지의 젊은날의 시절이다. 그때쯤 아부지는 가족계획을 세우셨을까?
아니면 "옛날에 테레비가 있냐?뭐가 있냐? 저녁이 길었제 ...그러다 봉께 ...." 라고 말씀하실까?그때쯤 아부지 하고 지금의  나하고 비슷하겠지 ...69년도의 아부지의 나이나 2011년도의 내 나이나.....

이곳 호주 퍼스는 아침 저녁으로 아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볼을 간지럽힌다. 침대에 누워 한쪽 팔을 괴고 갓난아이 배를 간지럽히다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봤다.
이 녀석이 10살이 되면 내가 마흔이 되는 거고 20살이 되면 내가 허걱 50이 되는 구나 ....
그럼 이  녀석은 내 젊은 날을 기억이나 할까? 난 녀석의 어린날을 죄다 기억할텐데 ....
내가 아버지의 젊은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녀석도 나의 젊은 날은 아예  없었던 노땅으로 생각해 버리지는 않을까?
아부지의 "성실하게 살야야 써" 를 마음속에 되뇌여 본다.
성실하게 살라는 의미가 일을 열심히 하라는 뜻인가? 아님 그 동안 성실하게 사는 것 처럼 보이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냥(?)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성실하게 사는 것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닌 나의 젊은날을 위해서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보지 못한 아부지의 젊은날도 분명 아부지 자신에게 "성실"하게 사셨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기 꼭 11년전의 사진이다.
내가 기억하는 엄니는 언제나 뽀글이 파마 스타일이었는데 처음 이사진을 앨범에서 발견했을때 그 놀라움이란 
아부지 엄니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이 그 청춘이다.
이 청춘을 놓칠수 없다. 가슴뛰게, 신나게, 눈물나게 '성실'하게 살거다.
우리 아부지가 그랬던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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